09. 4. 14.

지금의 나는 누군가 꾸는 꿈이 아닐까. 예를 들면 숙제를 다 못끝낸 체 잠들어 버린 귀엽지만 뚱뚱한 남자 어린이의 꿈이랄지..

입장의 차이

1.
고등학교 때 짝사랑 하던 상대가 나와 친한 친구와 사귀게 되었다.
당연히 상심했지만 친구에게는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태연한 체 하였지만 가끔 친구와 그 애를 같이 만나게 될 때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곤 하였다.
친구는 나에게 때때로 자신의 남자 친구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 놓았고 그럴 때면 나는 친구의 눈은 바로 보지 못하고 그 친구의 머리카락이나 손가락 등에 시선을 고정한 체 '내가 지금의 너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을 텐데 '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2009년 4월 12일 새벽 2시
일본의 센다이, 늘 하는 말로 한국으로 치면 대전쯤 되는 곳, 유흥가에 위치한 습하고 작고 허름한 클럽에서 나는 프리템포의 공연을 보고 있었다.
프리템포는 디제이를 하는 도중 영원불멸의 앤썸 'Sky High'를 틀었고, 원래의 보컬인 Blanc이 깜짝 게스트로 나와 라이브로 스카이 하이를 불러 주었다. 한국에 있는 많은 프리템포 팬들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감격스러워서 울먹였을지도 모른다. 스카이 하이의 원래 보컬이 나와서 노래했던 공연은 단 한번도 없었으니까.

나는 그 생각을 하면서, 내가 고등학교 때 그 친구가 되고 싶어했던 것처럼 아마 누군가도 나처럼 되기를 바라고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2.
그렇다. 지난 주말 나는 일본에 다녀왔다.시언이 프리템포의 power of love 일본 투어에 게스트로 초청받게 되어서 시언 덕분에 처음으로 일본 출장을 갈 수 있었던 것. 도쿄과 센다이에서 이틀에 걸쳐서 열린 공연이었고 한국에서 진행하였던 공연과는 여러모로 달라서 너무 흥미롭고 신선했다.

맥주를 마시면서 어린이라고 우겨서 받은 장난감


벌써 5년 정도 일본과 연관된 업무를 보고 있지만, 일본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고 이상스레 일어에 대한 감각도 전혀 늘지 않고 있다. 대표님과 이사님이 워낙 일어를 잘하셔서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맡아 하시기 때문에 동기 부여가 약하기도 하고, 욕심이 크게 있는 타입도 아니고, 대학교때 유일하게 낙제한 과목이 일본어 초급이기도 해서 여러모로 애정이 가지 않는 언어였다.


한푼 쓸모 없는 불어를 알리앙스에 충성하면서 배우고 지금도 시간이 있다면 과외라도 받고 싶어 하며, 가끔 잠들기 전 회화를 들으며 연습하는 것을 생각하면 일어는 나에게 스카치 테이프보다 아래 단계에 머무는 언어인 것이다.

아무튼 본인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일본에 대해 거부하고 있었다. 애국심 같은 것은 관계 없다.

이사님께서는 나에게 '수향아 일본은 딱 너 같은 곳이야. 너는 정말 일본 가면 좋아할 텐데'라고 늘 말씀하셨다. 하지만 난 별 감흥 없이 아 그래요? 이런 식으로 흘려 들었다.


하지만 알은 깨어지고 새는 태어났다. 디리링

일본 좋았다.
뭐든 좋았다.
이복동생을 만난 기분이었다.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만났더니 서로 닮아 있고 애틋해지는 그런 기분.



아무튼 도착한 지 십 분만에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살아서, 젊어서 도쿄에 올 수 있다는 게 너무 다행이라는 변덕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감 있는 셀라부들이 도쿄 도쿄 하는 지 알 것 같네.

처음으로 엔화를 쓰고 있는 광경

처음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광경




3.
저녁 9시에 리허설을 위해 fai aoyama로 갔다. 도쿄 공연 티켓은 매진이라고 하지만 fai aoyama는 서울의 앤써, 매스, 볼륨 등에 비교하면 이런 곳에 400명이 들어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꽤나 작은 클럽이었다. 패션 피플들이 자주 오는 클럽이라고 하는데 첫 인상은 잘 모르겠음 이었다. 다만 조용히 공간을 치우고 있던 스탭들이 굉장히 섬세하게 움직이고 있어서 멋지다. 라고 생각. 전체적으로 일본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중 한 명이 하프 재팬, 하프 프렌치였다. 이사님께서 그 스탭에게 물어봐서 확인하신 사실이었다. 또 급 흥분한 나는 약간 귀여운 그에게 급 호감상태가 되어 돼 먹지 않은 불어로 몇 마디 나눈 뒤 이따 봐 라고 인사하고 밥을 먹으러 갔다.


별 기대 안 했던 밥집에서 또 한번 기절

이건 시작에 불과했따.

이사님께서 '이 정도는 빙산의 일각이야'라고 말씀하셨지만, 초행길인 저는 무엇보다 맛있는 걸요. 일단 맥주가 굉장히 맛있었는데 그건 아마 내 피부가 일본에서 훨씬 촉촉한 것과 관계가 있는 듯 하다. 그러니까 기후와 기압의 차이가 아닐까라고 아주 막연히 생각하고 있다. 이 진짜 맛있는 밥을 프리템포가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위하여 쏘아주었다. 멋지다. 그리고 이런저런 계획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조금 밖에 알아 듣지는 못했지만..


fai aoyama는 프리템포가 10년 전에 처음 디제이를 했던 클럽이라고 했다.

fai aoyama곳곳에 있었던 축하 꽃다발

클럽 중앙의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가면 VIP룸이 나오는 데 그날 공연을 축하하고 격려해주기 위해 아티스트의 친구들이 와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즐기는 게 관례라고 한다. 이날도 Dreaming의 보컬 나미와 birds를 불렀던 보컬리스트 아야가 와서 시언과 프리템포를 축하해 주었다.
좌로부터 나미, 아야,프리템포 윗줄 시언


나는 진토닉으로 시작해서 블러디 메리를 좀 많이 마셨다.
마티니를 마시고 싶었지만, 그걸 마시다간 시언을 무대에 내보내는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어서 약한 것으로 조금씩 계속 자주-
일본은 확실히 술이 맛있다. 피부도 좋아지고, 일본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4.
큐 시트는 조금 애매하였다. 시언이 1시 30분에 Symmetry와 power of love를 부르고 4시에 다시 나와서 beautiful world를 한곡 부르는 순서였다. 그러니 시언의 대기 시간이 총 9시간을 넘어가는 강행군이 되는 것이다. 걱정이 되었지만, 씩씩하게 괜찮다고 이야기해주는 락스미스 맏딸 시언.
프리템포 역시 1시부터 3시까지 DJ를 하고 1시간을 쉰다음 4시부터 5시까지 다시 나와서 DJ를 하는 순서였다.

사람들에게 치여 자세히 못찍었지만 비욘세 싱글 레이디 콘셉트의 의상

시언이 나오자 클럽은 난리가 났다.
보통은 DJ들은 보컬을 같이 세우지 않으려고 드는 경우가 많다.
화려함에서는 아무래도 보컬을 따라가지 못하므로 집중도가 분산되기 때문이다.
시언은 일본 내 클럽 보컬들이 갖지 못한 강력함과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서 매번 일본에서 공연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엄청 좋아한다고 한다.

맨 앞줄에서 클럽 매니저와 이사님과 함께 시언을 덮치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있었다. 나는 이런 거 소질 있다. 뭔가 현장의 돌발 상황을 대처하는 것을 꽤 잘한다.



그리고POWER OF LOVE를 부르는 시간이 왔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는 썰렁한 반응에 나와 이사님은 당황했다. 모인 사람은 모두 프리템포의 팬이었고 POWER OF LOVE는 발매 하지 마자 일본내에서 i-tune 차트 5위에 올라갈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굉장히 희한한 일이었다. 아마 POWER OF LOVE가 한국어로 부르는 곡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삐죽삐죽.

시언이 다시 한번 나와서 beautiful world를 부를 때까지 대기실에 있는 동안 블러디 메리를 두 잔 더 마셨다. 블러디 메리에 각별한 애정을 갖게 된 것은 다즐링 주식회사의 오프닝 단편이었던 호텔 슈발리에를 보고 나서이다. 나탈리 포트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영화에서는 좋았다. 난 따라쟁이?

호텔 슈발리에



5.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새벽 5시가 넘은 시각 프리템포의 마지막 튠은 Drift mind였다. 그 동안 무수한 한국 공연에서 단 한번도 틀지 않았던 곡을 들을 수 있어서 만취 된 상태에서 센치한 상태로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 튠을 걸어 놓은 체 프리템포가 마이크를 들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꽤 오래 이야기 하였고, 말하는 중 프리템포의 감정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 당연히 한마디도 못 알아 들었지. 하지만 누군가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리템포도 조금 울었다.



나중에 이사님을 통해 들은 바로는 프리템포는 디제이를 그만 둘 거라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하였다. 저녁을 먹으면서 살짝 흘렸던 이야기였다. 프리템포는 앞으로 일본 내에서는 디제이가 아니라 다른 형태의 공연만을 할 것이고, 프리템포가 아닌 다케시 한자와로 활동을 할거라고. 천재니까 디제이만으로는 천재성을 백프로 발휘할 수 없을지도 몰라.라는 식으로 혼자 마구 생각하였다.


fai aoyama는 프리템포가 10년 전 처음 디제이를 하였던 곳이고 센다이는 프리템포의 고향이자 유명해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활동하였던 곳이다. 프리템포라는 이름을 걸고 하는 마지막 디제이 투어 장소에 담긴 의미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공연은 마지막의 미학이 있는 곳이었고 나는 정말 특별한 순간을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다들 부러워해주세요. 김수향이 되고 싶다라고 각자의 블로그에 적어 주세요.

우앙~ ㅠ.ㅠ



프리템포 음악이 왜 그렇게 아름다우며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대화를 깊이 나누어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리템포는 자신이 만드는 음악처럼 매우 순수한 사람이었으며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지. 쏘 뷰리풀..

마지막엔 언제나 샴페인.



프리템포의 앞날에 뿌리고 싶다 이꽃




2박 3일 짧은 기간에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잠을 하루에 4시간 밖에 못 자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깨어 있는 동안 계속 변화하는 세계를 경험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나는 여러 번 새로운 입장이 되어 보았다. 외국인이 되어 보는 것, 공연을 진행하는 입장이 아닌 아티스트 스탭으로 옆에 있어 보는 것, 예상치도 못한 이별을 맞이 한 것,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에 의외의 반응을 경험 한 것... 나는 자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데, 그럴 필요 없이 스스로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숙제를 다 못끝낸 체 잠들어 버린 귀엽지만 뚱뚱한 남자 어린이의 귓가에 누군가 속삭여 주세요. 그 잠에서 아직 깨지 말아 달라고.


나에게 멋진 해외 출장의 길을 열어 주신 대표님께 감사를 전한다.

"오냐"



일어 공부를 시작할까 말까 고민하고는 있는데, 여전히 불어가 더 좋긴 하다.

Au revoir


By alo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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